향토 역사인물
영양을 빛낸 역사인물을 소개합니다.
개요 | 본관은 김녕(金寧). 별명은 김도현(金燾鉉), 자는 명옥(鳴玉), 호는 벽산(碧山). 경상북도 영양 출신. 김성하(金性河)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양조씨(漢陽趙氏)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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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1895년 8월 을미사변과 11월 단발령이 시행되는 등 일제의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이 드러나는 상황이 전개되자, 12월 1일부터 1896년 1월 15일까지 안동군 임동면(臨東面) 등지에서 뜻을 같이 하는 유지호(柳止鎬)·권한모(權翰模) 등과 논의한 결과 우선, 읍내에 통문을 띄우기로 하였다. 그리고 안동창의진을 이끄는 참봉 권세연(權世淵)을 만나 시국을 논하는 한편, 의진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896년 2월 13일 유시연(柳時淵)과 청량산(淸凉山)에서 의병을 일으켜, 2월 25일 안동부로 진군하여 권세연의 안동의진과 합진하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3월 하순에는 의성 진영을 이끄는 중군장으로 함창·태봉 등 7읍의 의진과 합진,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5월 초순 평해의 이호성(李虎成)이 강릉의병장 민용호(閔龍鎬)의 소모사로서 방문, 청병하자 5월 10일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강릉으로 출진, 강릉 의병과 합진하여 5월 31일 삼척에서 관군과 접전하였으나 패하여 10여 명의 의병만을 거느리고 영양으로 돌아왔다. 그후 병영을 재정비하여, 입암(立巖)·소청(小靑) 등지에서 계속 활동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밀조를 접하고 10월 15일 영양 청기면 여미리(余味里)에서 부득이 의진을 해산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영남의 선비들과 더불어 상경, 을사조약반대 상소를 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 순국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동지의 만류로 실패하고 귀향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 당시에는 이만도(李晩燾)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914년 11월 어머니가 사망하자 영해의 관어대(觀魚臺)에 나아가 유서와 절명시를 남기고 바다에 투신, 자살하였다. |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전 |
개요 |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운동에 주력했다. 본관은 영양. 아버지는 통정대부 정한(廷漢)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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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여성계몽운동에 주력한 독립운동가이다. 남편이 일본군과 싸우다 죽자 유복자를 기르면서 시부모를 모셨고 을사조약 이후 의병으로 활동하던 친정아버지를 도와 장정을 모으고 정보를 수집했다.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서 일본군과 싸우다 부상당한 투사들을 간호했으며, 지린성에 교회를 세우고 여성교육회를 조직해 독립운동과 여성계몽 활동을 했다.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의 리튼 경이 하얼빈에 오자 무명지를 끊어 흰 수건에 '조선독립원'이라고 혈서를 쓴 뒤 이를 끊어진 손가락과 함께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 다음 해 일경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강인한 의지로 단식투쟁을 하다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말을 남기고 하얼빈의 여관에서 생을 마감했다. |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전 |
개요 | 일제강점기 남화한인청년연맹, 한족총연합회, 재만주조선인 아나키스트 연맹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38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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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집안이 빈궁하여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던 중 생계유지를 위해 1923년 만주로 건너갔다. 농업노동에 종사하다가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발발하자 안주할 땅을 찾아 중국땅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상해(上海)부근 남상(南翔)의 입달학원(立達學院) 교사 유자명(柳子明)을 만나게 되면서 남상에서 5리쯤 떨어진 남당(南塘)에서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무정부주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었다. 1932년 12월 상해 프랑스조계내의 복이리로정원방(福履理路亭元芳)에서 백정기(白貞基)·원심창(元心昌) 등을 만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5월 오면직(吳冕稙)·주열(朱烈)·안경근(安敬根)과 함께 일제 영사관 밀정 이종홍(李鐘洪)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8월 1일 정화암(鄭華巖)과 함께 105인사건에 연루되었던, 자칭 애국자 옥관빈(玉觀彬)이 당시 상해에 와서 일본 관헌과 내통하고 있음을 알고, 그의 사촌형인 옥성빈(玉成彬)의 집을 찾아 가는 것을 권총으로 처단하였다. 1934년 3월 초순, 당시 아리요시[有吉明] 공사가 무정부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또한 장개석(蔣介石)을 4,000만원으로 매수하여 만주를 포기하게 하고 열하에서 저항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하자, 그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공사가 일본으로 이 문제를 협의하러 출발하기 전에, 3월 17일 당시 일본인이 경영하던 고급음식점에서 송별회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백정기·이강훈·원심창 등 3명으로 하여금 부근의 중국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살해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1935년 3월 25일 이규호(李圭虎)와 함께 정화암·이달(李達)·전이방(田理芳) 등과 협의하여 상해조선인거류민회 부회장인 이용로(李容魯, 일명 李榮魯)가 일본총영사와 내통함을 알고 집으로 찾아가 처단하였다. 거사 직후 붙잡혀 1936년 3월에 사형언도를 받았다. |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전 |
개요 |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으며 기능보유자로 시신을 장지로 운구하는 도구인 상여를 제작하는 기능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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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1987년 5월 13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으나 기능보유자였던 경상북도 영양군의 김재환(金載煥)의 사망으로 인해 전승이 끊겼으며, 2004년 2월 27일 경상북도 무형문화재에서 해제되었다. 기능보유자였던 김재환은 24세경부터 50여 년이 넘도록 상여 제작에 종사하였으며, 상여와 영이(靈?)·관(棺)·혼백상자 등 장례에 필요한 도구 일체를 제작했다. 그가 제작하는 상여는 대체로 서민용으로 비교적 화려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 |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전 |
개요 | 시인.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대표작으로 <낙화(落花)>, <승무> 등이 있다. 1920. 12. 3, 경북 영양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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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청록파 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며 전통적 생활에 깃든 미의식을 노래했다. 본관은 한양. 본명은 동탁(東卓). 8·15해방 직후 국회의원을 지낸 아버지 헌영과 전주이씨(全州李氏)인 어머니 사이의 4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동진(東振)은 요절했으나 〈세림시집〉을 펴낸 시인이었다. 1939~40년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문장〉에 시 〈고풍의상 古風衣裳〉·〈승무〉·〈봉황수 鳳凰愁〉가 발표되어 문단에 나왔다. 이어 〈백지〉에 〈계산표〉·〈귀곡지 鬼哭誌〉·〈진단서〉 등을 발표했는데, 이 시들은 회고적·민속적인 것을 소재로 민족적 정서와 전통에 대한 향수를 읊은 것이다. 특히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로 시작되는 〈승무〉는 그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시로, 섬세한 미의식과 불교세계에 대한 관심을 잘 보여준다. |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전 |
개요 | 시인.경상북도 영양 출생. 1910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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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영양군 석보면 원리(두들마을)에서 태어난 이병각은 신석초의 회상에 따르면 〈헌헌장부〉였고,〈시학의 추억〉 속에서 중요한 멤버로 기억된다. 『시학』이 5호로 종간될 때까지 매호에 작품을 싣고 있다. 김영식에 따르면 이육사는 이병각 부부가 폐병을 앓자 옆에서 간호했으나 이육사의 건강은 더욱 나빠졌다고 한다. 또한 김유정, 김해강, 김기림, 김소엽 등 작가의 작품론을 썼고, 김유정의 죽음을 애도하는 「여름 제물(祭物)」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했다가 퇴학당하고 일본유학 중에서 검거되어 조선으로 송환되어 체포되기도 한다. 이후 조선일보사 기자가 되었고 1935년 이후부터 잡지, 신문에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1941년 후두결핵으로 요절하게 되어 작품활동의 기간은 몇 년이 되지 않는다. 그는 병든 몸으로 직접 한지에다 모필로 시집을 묶었는데, 그 첫 장에는 ‘가장 괴로운 시대에 나를 나허주신 어머님게 드리노라’(1940년 2월)라고 쓰여 있다. |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전 |
개요 | 본관은 낙안(樂安). 본명은 오희병(吳熙秉). 아호는 일도. 경상북도 영양 출신. 아버지는 오익휴(吳益休), 어머니는 의흥 박씨(義興朴氏)이다. 1901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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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14세까지 향리의 사숙(私塾)에서 한문 공부를 한 뒤, 1915년 15세에 한양 조씨(漢陽趙氏) 조필현(趙畢賢)과 결혼하였다. 그 뒤 1918년 영양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京城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졸업하지 않았다. 1922년 일본 도쿄로 건너가 강습소에서 수학한 다음 릿쿄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하였다. 귀국 후 1년 동안 덕성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근화학교(槿花學校)에서 무보수 교사로 근무하다 고향에 있는 맏형 희태(熙台)로부터 사재(私財)를 얻어 1935년 2월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을 창간하였다. 이 잡지는 1935년 12월 5호를 내고 발행이 중단되었다. 그 동안 그는 이헌구(李軒求)·김광섭(金珖燮) 등과 가까이 지냈고, 또 『시원』의 발행을 중단한 뒤에도 『을해명시선(乙亥名詩選)』(1936)과 요절한 조지훈(趙芝薰)의 형 조동진(趙東振)의 유고 시집인 『세림시집』(1938)을 출판하였다. |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전 |
개요 | 소설가. 인간의 자유문제와 작가적 고뇌를 그려냈다. 대표작으로 <사람의 아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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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6·25전쟁 때 공산주의자인 아버지 원철이 월북한 이후 어머니 조남현과 5남매가 경상북도 안동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렵게 살았다. 1965년 안동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방황하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1970년 중퇴하고 사법고시에 전념했으나 실패, 1973년 결혼과 동시에 입대했다. 1977년 대구에 있는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나자레를 아십니까〉가 입선된 뒤, 197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 〈새하곡 塞下曲〉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해 〈사람의 아들〉(세계의 문학, 1979. 6)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으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으며, 이어 〈황제를 위하여〉(문예중앙, 1980. 9)·〈우리 기쁜 젊은 날〉(세계의 문학, 1981. 6)·〈금시조 金翅鳥〉(현대문학, 1981. 12)·〈익명의 섬〉(세계의 문학, 1982. 3)·〈영웅시대〉(세계의 문학, 1982. 9~1984. 6)·〈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세계의 문학, 1987. 6)·〈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등의 문제작들을 발표했다. |
출처 | 한국민속문화대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