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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설모음



    • - 비릿골 (조덕호, 영양 상원초등교, 1968. 8. 『영남의 전설』) 때는 조선조 중엽, 영양읍 상원리 비릿골에 한양조씨 후손인 수월(水月)과 사월(沙月)이 라는 형제가 살았다. 어느 날 조모가 병환으로 눕게 되어 용한 의원을 찾아가 처방을 받아 수발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하루는 조모가 수월공을 불러 잉어를 먹으면 병이 나을것 같다고 말하였다. 때는 흰 눈이 덮이고 얼음이 꽁꽁 언 엄동설한이지만, 수월공은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생각하고 강가로 나갔다. 얼음을 뚫고 잉어를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하고 기진맥진하여 그 자리에 정신을 잃고 쓰러져 버렸다.잠시 후 정신을 회복한 그는 얼음을 깨고 다시 잉어를 잡으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울면서 강가를 헤매고 있을 때 갑자기 얼음이 갈라지더니 큰 잉어 한 마리가 강위로 뛰쳐 올라 왔다. 이에 그 잉어를 가지고 와서 조모께 다려 드렸더니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수월공의 효성을 본받기 위해, 그 곳을 잉어가 나른 골짜기란 뜻으로 비릿골이라고 하였고, <승정처사 수월공 검축천단비란 비각과 비리동천(飛鯉洞天)>이란 비를 세웠다.
      - 벼락바위 (이원기, 남21세, 영양읍 동부리, 1966. 8. 상게서) 영양읍에서 약 4km 떨어진 곳에 둘레 약 30m, 높이 약 6m 되는 바위가 마주보고 있다. 이를 일면 '뚜껑바위 내외' 또는 '벼락바위 내외'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300여년 전 이 근처에 노총각이 외롭게 살았는데, 장가를 들려면 뒷 산에서 백일 기도를 드리라는 주위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정성껏 기도를 드리기 시작하여 마지막 날 건너편을 보니 전에 없던 집이 보였다. 이상히 여겨 다가가 방안을 들여다 보니 어여쁜 처녀가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러자 처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어젯밤에는 너무 외로웠어요. 꼭 오실 줄 알았습니다."하는 것이 아닌가. 이 날로부터 두 사람은 부부가 되어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깨가 쏟아지는 생활을 보내던 4년 뒤의 어느날,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는 고을 원이 부임하게 되었다. 하루는 노총각의 부인이 된 색시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강제로 끌고 가서 수청을 들게 하였다. 남편은 눈물로 여러날을 보내는데 갑자기 부인이 나타나서, 한시 바삐 몸을 피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집에서 나오기도 전에 포졸들이 와서 집에 불을 질러 버렸다. 이에 부부는 나오지도 못하고 불 속에 뒹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나졸들이 죽고, 부부는 두개의 바위로 변해 버렸다.그 후 마을 사람이 나무를 하러 갔다가 바위 위에 뚜껑이 있어, 그것을 열어 보니 벼락이 치고 천둥소리가 들리므로 겁을 집어 먹고 내려왔다. 이로 말미암아 이 바위를 '뚜껑바위 내외' 또는 '벼락바위 내외'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 선유굴(仙遊窟) (황우섭, 남67세, 영양읍 하원리, 1967. 11. 상게서) 영양읍 하원리 반변천에는 천여 명이 앉아 놀 수 있는 큰 반석이 있는데, 이를 선유굴이 라고 일컫는다. 옛날 사슴이 맹수에 쫓겨 달아나다 낭떠러지에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밤이 되어 정신을 차린 사슴은 반변천 물을 마시려다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반변천에 목욕하러 내려온 선녀들이 이를 보고 구해 주었는데, 목숨을 건진 사슴은 선녀들의 은혜에 보답코자 산신에게 약 400m 앞에 가로막힌 산등성이를 헐어 물길을 바르게 내어 더욱 좋은 명승지로 만들어 달라고 기원하였다. 이에 그 소원이 이루어져 반변천의 선유굴은 더욱 경치가 좋게 되었다고 한다.
      - 피바닥소(沼) (조동섭, 남48세, 영양읍 하원리, 1966. 8. 『영남의 전설』) 영양읍 대천리에 있는 늪 이름. 지금부터 500여년 전 이 늪에는 큰 용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근처 한 절에는 불법에 도통하여 곧 승천하기에 이른 노승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에 자신이 붉은 옷을 입고 승천하려고 하는데, 용이 갑자기 트림을 하니 자신은 알몸이 되는 이상한 꿈을 꾸었다. 이튿날 늪에 가보니 용의 머리가 못위로 솟구치고 있음을 보고, 이 용이 자신의 승천을 방해한다고 생각하여 용을 처치하기로 결심하였다. 며칠 후 중은 많은 물을 끓여 늪에 넘치도록 붓자, 갑자기 용이 몸부림을 치더니 앞산이 갈라지고 그 사이로 용이 사라졌다. 이 때 늪은 용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게 되었는데, 지금까지도 늪바닥은 붉은 빛을 띠고 있고, 이리하여 이 소를 '피바닥소'라고 하였다 한다.


    • - 무학리(舞鶴里) (『경북마을지』하권) 영양읍 동쪽에 있는 동명으로 자무리와 대학리를 병합하여 이루어진 동네, 옛날 대학리에서 무덤을 파는데 광중에서 큰 학이 나와 날아갔다고 하여 대학리라고 하였다 한다.
      - 남이포(南怡浦)의 석상(石像) (상게서) 입암면 연당리 선바위(立岩) 맞은 편에 있는 20m 절벽 중간에 새겨져 있는 사람의 얼굴상. 세조 때 남이 장군이 이 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아룡(阿龍)·자룡(子龍) 형제와 남이포에서 싸우게 되었다. 아룡이 별안간 몸을 날려서 공중으로 치솟으므로 남이 장군도 몸을 날려 공중에서 격전을 벌여 아룡을 죽이고 검무를 추며 내려오면서 칼끝으로 절벽에 자신의 상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 학산(鶴山) (『경북마을지』하권) 입암면 금학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서 무학(茂鶴)이 춤을 추는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 곳에 묘를 쓸 때 학이 날아간 일이 있은 뒤로 '학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 운용지(雲龍池) (상게서) 입암면 대천리(大泉里)에 있는 못 이름. 여기에는 원래 신라 시대에 큰 절이 있었는데, 부처가 노하여 용의 입을 막자 용이 꼬리를 치며 벼락을 떨어뜨려 절이 파괴되고 연못으로 변하였다고 한다.
      - 울릉못(임효상, 남 40세, 입암면 산해리, 1965. 11. 『영남의 전설』) 입암면 운용지를 일명 울릉못·울령못이라고 하였다. 옛날 이 곳은 수풀이 우거진 산으로 속인들의 휴식처였고, 세상을 등진 선비들의 은둔처이기도 하였다. 또한 참선의 적지라 수도하는 중들이 모여 사찰을 조성하였다. 어느 날 중들이 개울에서 발을 씻다가 물고기를 보고 마음이 동하여 이들을 잡아 먹고 말았다. 이에 부처님이 계율을 어긴 중들을 벌주기 위해, 절과 산을 없애고 못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이 못을 오늘날 '울릉못'이라고 한다.
      - 소나무 제단(상게서) 입암면 아래 신사리에 있는 소나무. 부자 조씨의 며느리가 손님이 오는 것을 싫어하여, 스님에게 손님이 오지 않도록 하여 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스님이 마을 앞 용두산 줄기를 끊으라고 하매, 그대로 실천한 결과 손님은 오지 않았으나 결국 조씨 가문도 망하게 되었다. 이에 동민이 화가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소나무 두 그루를 심고 제단을 조성하여, 정월 15일에 고사를 지내게 되었다고 한다.
      - 영등산(嶺登山) 절터(상게서) 입암면 산해리 영등산 굴 아래에 있는 절터. 옛날에 대찰이었으나, 한 중이 4월 초팔일에 '계'를 어기고 '개'를 잡아 먹었으므로, 금강산의 도승이 앞산의 혈을 자르고 뒷산의 수맥을 잘라 물을 내려 보내 이 절을 묻어 버렸다고 한다.
      - 사창보(洑) (정휘숙, 남 68세, 입암면 연당1리, 1996. 10. 27.) 입암면 병옥리(사창리)에 있는 보 이름. 영양 시내를 관통하여 흐르는 냇물을 사창들에 끌어 쓰기 위하여 동민들이 작은 산등을 뚫어 수로를 내었는데, 그 때 산등에서 붉은 피가 흘렀으며, 그후 한동안 병옥리에는 역병이 돌고 흉년이 들어 많은 사람이 동네를 떠나 동세가 약해졌다고 한다.


    • - 동삼(童參) (조씨부인, 여 69세, 청기면 사리, 1968. 8.『영남의 전설』) 옛날 청기면 사리에 효성이 지극한 젊은이가 있었다. 하루는 부친이 중병에 걸려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희생의 기미가 없었다. 마침 한 곳에 천하 명의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불원천리하고 달려가서 처방을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명의는 입을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며칠을 묵으면서 재촉하자, "병을 고칠 수는 있으나, 약을 구할 수가 없구나." 하면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이에 효자는 품속의 비수를 꺼내 "부친의 병을 고치지 못할바에야, 나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고, 이제 그대는 처방이 있으면서도 알려 주지 않으니 그대를 먼저 죽이고 나도 죽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명의는 "내가 말하지 못한 것은 그대의 막내 아들이 명약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효자는 집으로 돌아와 마당에서 놀고 있는 막내 아들을 잡아 가마솥에 넣고 삶아 그 물을 부친에게 드렸더니 곧 회복되었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 자식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해가 지자 자신이 죽였다고 생각했던 막내 아들이 "엄마!"하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 왔다. 이에 깜짝 놀라 가마솥을 열고 보니 그 속에는 동삼이 들어 있었다. 이에 마을에서는 효자의 지성에 하늘이 보응한 것이라고 하였다.
      - 학이 날아 간 무덤(김동걸, 남 51세, 청기면 저리, 1968. 9.『영남의 전설』) 지금부터 약 300여년 전 청기면 모싯골에는 경주 김씨와 영양 남씨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경주 김씨가 들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대사가 와서 공양을 요구하기에 집으로 데려가 후히 대접하였다. 이에 대사는 은혜에 보답코자 마을 뒷산 옥녀봉에 올라가 명당을 잡아주며, "하관할 때 흰 말을 타고 오는 사람과 쇠 우산을 쓴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후 김씨집 딸이 남씨집으로 시집을 갔다. 시가인 남씨집에 초상이 나자 며느리는 친정에서 들은 이야기를 했다. 이에 사위는 처가집에 찾아가 묘터를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방문 앞에서 농성을 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다. 그 후 김씨집에 초상이 나서 옥녀봉에 묘를 쓰려고 하는데, 광중이 너무 작아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때, 사위가 흰 말을 타고 오다가 비가 오므로 하인을 시켜 자신이 갈 때까지 하관을 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 때 하인은 우산이 없어 솥뚜껑을 덮어쓰고 올라가서 전갈했다. 비가 그치자 사위가 장지에 올라와서 더 파라고 하자 상주는 대사의 당부가 생각나서 거절했으나 사위의 주장이 워낙 완강한지라 땅을 얼마 더 파 보았다. 그러자 바위가 갈라지면서 학 두 마리와 금두꺼비가 나타났는데, 학 한 마리는 능암산으로 또 한 마리는 탄금대로 날아갔다. 이에 장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복이 날아갔다고 말하였다. 할 수 없이 학이 나온 구멍을 메우고 하관했는데, 달구질할 때 그 곳으로 관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도 옥녀봉에는 학이 나온 무덤이 있고, 청기면 모싯골에는 경주 김씨와 영양 남씨가 세거하고 있다.

    • * 황씨 부인당
      - 첫번째 전설 지금부터 약 160여 년 전 순조 때 청기면 당리에 살던 우씨(우씨)의 부인 평해(평해) 황씨(황씨)는 남편과 혼인하여 금실 좋게 살았으나 딸만 9명을 낳아 시어머니의 학대가 극심했다. 황시 부인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죄책감으로 얼굴을 들고 시어머니와 남편을 대 할 수 없어 아홉째 딸이 젓 뗄 무렵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씨댁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했다. 이 무렵 일월산에 산삼이 많이 났는데, 산삼 캐는 사람이 산삼을 캐려고 자기가 지어 놓은 삼막(삼막)에 갔더니, 황씨부인이 자기의 삼막에 소복단좌하고 있었다. 더럭 겁이 나 되돌아서려는데, 황시부인이 말을 하기에 자세히 보니 분명 살아 있는 황씨부인이었다. 황씨부인은 자기 시어머니와 남편의 안부며 딸의 안부를 묻고는 자기가 여기에 있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산삼 태는 사람은 그렇게 하겠다는 말을 하고 돌아섰으나, 어쩐지 마음이 섬뜩하여 그 길로 산을 내려와 우씨댁에 가서 그 이야기를 전하였다. 금실좋게 살던 우씨는 부인을 잃고 삶의 재미를 모르고 살던 중 자기 부인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장 삼막에 가보니, 과연 자기 부인이 앉아 있어, “여보!”하고 달려가 손을 덥석 잡으니 부인은 사라지고 백골과 재만 남았다. 남편은 탄식을 하면서 백골을 거두어 장사지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이 황씨부인의 한을 풀기 위해 그 자리에 당을 지어 주고 ‘황씨부인당’이라 했다고 한다. (이재춘 제보, 유달선 조사, 박진태 외 1인 공저, 『영남지방의 동제와 탈놀이』,태학사, 1996)
      - 두번째 전설 약 150년 전 순조 때 청기면 당리에 우씨 청년이 일찍 과부가 된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오두막집과 것은 땅마지기만으로 농사를 지으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다. 이웃마을 평해 황씨와 결혼하여 아내를 극진히 사랑하며 살았다.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낳고 사는데, 아들의 지극하던 효성이 약해지자 사랑을 빼앗긴 청상과부 시어머니의 시샘과 질투는 더욱 심해져서, 며느리의 조그만 실수도 용서하지 않고 학대했다. 그리하여 황씨부인은 차라리 저승에 가서나마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보려고 남매를 집에 남겨 두고 우물에 가는 척 집을 나와 일월산으로 들어갔다. 그 뒤 산삼 캐는 사람이 움막 안에서 목을 매고 죽어 있는 낮선 부인을 발견하고 놀라서 산을 내려 왔다. 그때 이 마을에 살던 영천 이씨 명존이란 사람이 황씨부인이 현몽한 대로 남편에게 알리니, 남편이 황씨부인의 유골을 거두어 장례를 치렀다. 그 후 황씨부인이 다시 이명존의 꿈에 나타나 “여보시오. 나는 어린 자식을 두고 일찍 목숨을 끊은 죄로 저승에서도 방황하는 혼령이오니, 가난한 우리 남편을 대신해서 내 외로운 혼령이 쉴 수 있도록 당사를 세워 주시면 여한이 없겠나이다.”라고 말하여 이명존이 황씨부인의 현몽대로 당사를 지어 그녀의 원혼을 위로했다고 한다.(『경북마을지』,하,1992)
      - 세번째 전설 옛날옛날 영양군 일월산 밑에 황씨라는 처녀가 살았다. 마을에는 그녀를 사랑하는 총각이 둘 있었는데, 그중 몸은 약하지만 마음이 고운 사람을 선택해서 결혼식을 올렸다. 혼례를 올린 날 신랑은 뒷간에 갔다가 오는 길에 마치 칼을 들고 자신을 기다리는 듯한 사내의 모습이 신방에 언뜻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그 날로 타관으로 도망쳐 버렸다. 신랑이 타관으로 도망간 사실을 모르는 신부는 녹의흉상에 족두리 화관을 쓴 채로 하루 이틀 기다리기를 오년여 계속하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낯선 마을에 정착한 신랑을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 지방에 있는 처녀에게 새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백일을 채우지 못하고 죽기를 네 번이나 했다. 무당을 찾아가 사연을 물어 본 즉, 죽은 귀신이 아직도 너를 기다리기 때문에 네 자식은 모두 죽었고, 모두가 사는 방법은 귀신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사내는 무당의 말대로 고행의 옛집을 찾아가서 폐가가 된 신방에 들어가 보니 신부는 초야의 모습 그대로 시체가 되어 풀 더미 속에 앉아 있었다. 사내가 툇마루에 앉아 있다가 잠이 들었는데, 신부가 나타나 나를 업어다가 일월산 산마루에 앉혀 달라고 부탁하였다. 꿈에서 깨어나 신부의 부탁대로 하자 죽은 신부는 “이제는 하직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이에 사내는 산에 있으면서 바위를 쪼아 족두리를쓴 신부 모양의 석상을 만들고, 작은 사당을 지어 조석으로 봉양하다가 돌신부 옆에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산사태로 사당이 무너지고, 오랜 세월이 흘러 사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1946년 부산에 살던 한 아낙네가 병에 걸려 상태가 점점 악화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한 여자가 나타나, “나는 일월산 황씨부인인데, 나를 파내서 섬기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남편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일월산으로 함께 가서 초막을 짓고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 날 발이 닿는 대로 가다가 웅덩이에서 족두리를 쓴 석상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당집을 짓고 석상을 섬겼다. 그 이후 그 아낙네의 병을 씻은 듯이 나았고, 아울러 황씨부인당의 영험을 받아서 용한 무당이 되었다고 한다.(『김열규 에세이』 중 ‘일월산 산신된 새색시’ 참조)


    • - 문수당(이종명, 남 64세, 수비면 신원리, 1996. 7. 11) 옛날 암행어사 박문수가 영양지역에 들렀을 때 백성들의 신원을 잘 해결해 주어 그 공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울련산중턱에 있는 성황당. 이 곳에는 영험이 있다고 전해지는 구슬이 전해져 왔었는데, 그것을 분실한 후 성황당을 새로 조성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 정월 대보름날 그 자리에서 연을 띄워 떨어진 곳인 지금의 울련산 중턱에 다시 문수당을 조성하고, 이를 '문수당골'이라고 하였다. 특히 문수당은 동해안 지역 어민들에게 영험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울진·매화·죽변 등에서 새롭게 성황당을 조성할 때 무당이 도보로 와서 강신을 하여 간다고 한다.
      - 한티재(상게서) 수비면 계리에 있는 큰 재. 임란시 의병과 왜군이 이 골짜기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바 있어, 지금도 비만 오면 핏물이 바위 틈에서 흘러나오고 있으며, 통로의 반석 위에는 많은 말발굽 자국을 선명히 볼 수 있다고 한다.
      - 너븐돌(상게서) 수비면 오기리(五基里)에 있는 10㎡의 넓은 바위로 일명 광석(廣石)이라고도 한다. 옛날 정태(丁台)라는 사람이 기거할 곳을 찾아 헤매던 중 천태산(天台山)에 살고 있는 마고(麻姑)할미가 아들을 찾아 헤매는 것을 보고, 천년 묵은 여우와 싸워 바위 속에 갖혀 있는 마고할미의 아들을 구출하여 천태산으로 가던 중 큰 바위를 싸들고 오는 마고할미를 만났는데, 이때 마고할미는 아들을 만난 기쁨에 바위를 버리고 천태산으로 가버렸다. 혼자 남은 정태는 바위에 앉아서 쉬다가 그 자리가 좋은지라 '너븐돌'이라고 부르고 이 곳에 살았다 한다.
      - 화랑곡(상게서) 수비면 발리에 있는 골짜기. 산세가 아름답고 물이 좋은 곳이어서 신라 시대 화랑들이 수련하던 곳으로 알려져 '화랑곡'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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